조선(朝鮮) 제1대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의 가계도(家系圖)

     

    •탄강 : 서기 1335년 10월 27일 (음력 10월 11일)

    •즉위 : 서기 1392년 8월 5일 (음력 7월 17일)

    •퇴위 : 서기 1398년 10월 14일 (음력 9월 5일)

    •승하 : 서기 1408년 6월 18일 (음력 5월 24일)

     

    태조는 1335년 고려 忠肅王(충숙왕) 복위3년 음력 10월 11일 원나라 쌍성총관부에 속해있던 함경도 영흥 흑석리(화령부/和寧府)에서 환조 자춘(子春)과 의혜왕후(懿惠王后) 최씨(崔氏)의 2남으로 태어났다.

     

    고려 말의 무신이자 조선의 초대 왕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성계(成桂), 휘(諱)는 단(旦), 초자(初字)는 중결(仲潔), 등국 후 자는 군진(君晋), 호는 송헌(松軒)·송헌거사(松軒居士)이다.

     

    시호는 태조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며 이후 존호를 더하고 대한제국 때 명나라에서 내린 시호 강헌(康獻)을 폐지하고 고황제(高皇帝)로 추존하여 정식 시호는 태조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太祖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이다. 재위 기간은 6년 2개월이며, 상왕위(上王位)에는 약 10년 동안 있었다. 향년은 74세이고 능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건원릉(健元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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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의 생애(生涯)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태어날 때부터 총명하고, 풍채는 영특하고 준수하며, 지략과 용맹은 월등하게 뛰어 났다고 한다.

     

    고려에서 관직은 문하시중에 이르렀고, 고려 우왕 때,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서 요동정벌을 위해 북진하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고려 공양왕으로부터 양위의 형식으로 조선을 개국하여 약 220여 년간의 고려 암흑시대를 종결하였다. 원래 이름은 "성계" 였으나 조선건국 후 단으로 이름을 개명하였다. 막강한 권력으로 전제개혁을 단행하였고, 신진세력의 경제적 토대를 구축했으며, 도읍을 한양으로 옮겨 조선의 기틀을 다졌다.

     

    원나라와 홍건적 격퇴

     

    1356년(공민왕 5년) 유인우가 공민왕의 명을 받들어서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아버지와 함께 공을 세웠고, 1361년(공민왕 11년)에 상만호(上萬戶)가 되어 고려의 함주 지방(함경도 지역)의 경비를 맡았다.

     

    1361년(공민왕 10년) 음력 10월에 고려 정부의 명령을 받고 출동하여 독로강 만호(禿魯江萬戶) 박의(朴儀)의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같은 달에 다시 압록강의 결빙을 이용하여 홍건적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여 수도가 함락되자 이성계는 휘하의 고려인 및 여진족으로 구성된 강력한 친병 조직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 작전에 참가하였다.

     

    1362년(공민왕 11년) 심양행성 승상(審陽行省丞相)을 자처한 원나라 장수 나하추(納哈出)가 수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함경도지방으로 쳐들어오자,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출정해 여러 차례 격전 끝에 함흥평야에서 원나라 군대를 격퇴시켜 명성을 크게 떨쳤다. 적장인 나하추마저 이성계의 뛰어난 용맹과 탁월한 군사적 재능에 감탄하며 깊이 존경할 정도였다.

     

    1364년(공민왕 13년) 원나라의 기황후가 최유(崔濡)를 시켜 몽고족 군사를 이끌고 공민왕을 몰아내고 덕흥군(德興君)을 세우려고 압록강을 넘어 침입하자 이를 막았고, 함주를 침공한 여진족 김삼선(金三善)·김삼개(金三介) 형제를 격퇴하여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임명되었으며, 1370년(공민왕 19년) 평양의 원나라 동녕부(東寧府)를 원정하여 국토를 확장하였다.

     

    왜구 격퇴

     

    고려의 왜구 토벌사에서 최대의 전과로 꼽히는 지리산의 황산전투에서 크게 전공을 세웠다.

     

    1380년(우왕 6년) 이키 섬 출신 아키바츠(阿只拔都, 阿其拔都)라고 하는 소년 장수가 왜구를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여 지리산 일대를 약탈하며 북진을 하자 이성계는 삼도 도원수(三道都元帥)로 임명되어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여 황산에 진을 치고 왜구 적장 “아키바츠”를 활로 쏘아 죽이고 왜구를 물리쳤다. 기록에 따르면 “죽임을 당하는 왜구의 곡성이 마치 만 마리의 소의 울름소리 같았고, 냇물이모두 그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라고 한다.

    이 전투를 “황산대첩(荒山大捷)”이라고 한다.

     

    요동 정벌 반대와 출정

     

    1388년(공양왕 1년) 2월 명나라는 철령(강원도 안변) 이북의 땅을 점령하겠다는 통고를 하고, 철령위라는 관청을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했다. 최영은 반발했으나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는 명나라의 요청을 받아들이자고 하였다.

    그해 4월, 최영과 우왕은 명의 만주 기지인 요동을 공격해서 명나라의 야심을 꺾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반대하면서 그 이유로 4가지를 들었다.

    “소로서 대를 거역하는 것이 첫째 불가이고, 여름에 군대를 동원하는 것이 둘째 불가하고, 온나라 군대를 동원하여 원정하러 가면 왜적이 그 틈을 노릴 것이니 셋째 불가하고, 지금은 여름철이라 비가 자주 내리므로 아교가 녹아 활이 녹고 군사들은 질병을 앓을 것이니 넷째 불가하다.” 이것이 이른바 '4불가론'이다. 그러나 요동정벌은 단행되었다.

     

    위화도 회군

     

    1388년(우왕 14년) 정치적 동지 포은 정몽주, 최영과 협력하여 이인임 일당의 전횡을 제거하고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이르렀을 때 병력 4만의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가 되어 요동을 정벌하러 갔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반대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잡았다.

     

    당시 전란으로 피폐해진 고려의 현실상 대규모 원정을 단행하는 것은 무리였기에 이성계를 비롯한 여러 신료들은 탐탁지 않게 여겼다. 이성계가 진군하다가 위화도에 이르렀을 때 장맛비가 계속 내렸으므로 회군을 청하였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자 군사들을 설득하여 회군하였다. 회군한 이성계는 개경을 점령하여 우왕을 폐위하고, 최영을 제거하여 군사적 실권을 장악한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가되었다. 이때 길가의 어린 아이들이 "나무의 아들(木子)이 나라를 차지하리라."라는 동요(참요)를 부르자 백성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따라 불렀다고 한다.

     

    위화도회군은 신진사대부가 신흥 무인 세력을 끌어들여 구세력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자, 조선왕조가 개창되는 단초를 이룬 사건이다. 그의 위화도 회군에는 정도전, 정몽주 등의 적극적인 협력이 있었다.

     

     

    조선의 개국

     

    정도전, 배극렴, 조준, 남은 등의 추대를 받아 1392년 8월 5일(음력 7월 17일)에 송경(松京) 수창궁(壽昌宮)에서 공양왕으로부터 선위(禪位) 받아 왕위에 올라 개국하였다.

    1393년 3월 27일(음력 2월 15일)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고쳤다.

     

    말년

     

    1398년 태조고황제 정비(正妃)인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여섯 왕자 중 다섯째 아들인 방원의 “왕자의 난”으로 두 왕자를 잃자 태조는 상심하여 왕위를 둘째 왕자인 정종(定宗)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 함흥으로 갔다.

    태종이 왕에 오르고 1402년(태종 2년)에 다시 함경도로 들어간 채 돌아오지 않는 태조(고황제)를 모셔오기 위해 태종이 차사(差使)를 보내어 돌아오기를 권유하니, 차사마저 돌려보내지 않고 죽였다는 전설이 있어 “함흥차사”란 말이 생겨났다. 뒤에 무학대사가의 설득으로 한양으로 돌아왔다.

     

    1401년 한성부로 돌아온 태조는 만년에 불교에 전념 하다가 7년을 더 살고 1408년에 병으로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향년 74세로 승하하였다. 바로 명나라의 영락제는 강헌(康獻)이라는 시호를 보내왔다.

    그의 진영(眞影)이 영흥(永興)의 준원전(濬源殿) 및 전주(全州)의 경기전(慶基殿)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능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건원릉(建元陵)이다.

     

    치적

     

    태조는 조선의 3대 기본 정책을 내세워 건국이념으로 삼아 조선 왕조의 기반을 튼튼히 하였으니, 정치적으로는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삼고 국호 및 왕위의 승인을 받아 양국의 친선을 도모하며, 그밖에 다른 나라와 교린하는 사대교린정책을 썼고, 문화적으로는 숭유배불(崇儒排佛) 정책으로 고려 말기의 부패한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세웠으며, 경제적으로는 농본주의 정책으로 농업을 장려하고 전지(田地)를개혁하여 농본민생주의에 따른 신분 사회제도를 확립하였다.

     

    1394년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여 새 수도의 도시 계획을 구상하였다. 이어서 음력 10월에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하였다. 이는 왕씨의 본거지인 개경을 버리고 한양(漢陽)으로 천도하여 도성을 신축하는 등으로 국가의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1395년(태조 4년)에는 도성축조도감이라는 관청을 설치, 성을 쌓기 위한 기초측량을 하게 했다. 총책임자는 정도전을 임명했다. 1396년부터 성곽을 쌓기 시작 1년여 만에 완성했다.

     

    논공행상으로 창업에 공을 세운 이에게 개국공신의 호를 주고 전지(田地)와 노비를 내리어 왕권을 튼튼히 하였으며 관제(官制)를 비롯한 국가의 시설을 정비하고 정도전 등으로 하여금 《조선경국전》,《경제육전》등을 찬집(纂輯)하게 하여 반포하는 등 여러 가지 정책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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